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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관계 알아보기 (바람과 구름과 비를 보면서)

요즈음 가장 즐겨보는 드라마가 TV조선에서 하고 있는 [바람과 구름과 비]입니다.

[바람과 구름과 비]는 이병주가 지은 소설인데요, 1977년 2월 12일부터 1980년 12월 3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KBS에서 1989년에 같은 제목으로 50부작으로 드라마를 한 적이 있었고요, 이번에 다시 TV조선에서 21부작으로 리메이크되어 드라마로 나오고 있습니다.

워낙에 소설내용이 탄탄해서 드라마자체가 처음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보게 된다고나 할까요?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

 

드라마의 내용은 조선말 최고의 역술가인 최천중이 흥선대원군과 만나면서 왕위쟁탈전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사랑과 야망을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최천중은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실제로 [박유붕]이라는 관상가가 드라마에 나오는 최천중과 비슷한 인물이라 보입니다.

 

박유붕은 실존인물로서 조선말 최고의 관상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박유붕은 운현방을 지나다가 우연히 열린 대문 사이로 놀고 있는 한 아이를 보았고 운현궁으로 들어가서 아이의 관상을 자세히 살핀 후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서 큰절을 올리고는 '상감마마 문안인사 올립니다'라고 했답니다.

그 아이가 바로 흥선군의 작은 아들인 명복 도령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흥선군의 작은 아들인 이희(고종)가 왕이 되고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면서 박유붕은 흥선대원군의 책사로 발탁되고 많은 재물을 안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년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세력다툼에 휘말려 살해당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만, 정확히 전해지는 얘기는 없습니다.

 

[바람과 구름과 비]를 보면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등장으로 인해 이들의 역사가 궁금해지는데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관계로 조선말 역사를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역사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1820년(순조20년)에 한성부에서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 남연군의 4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이름난 수재였지만, 어머니와 맏형, 아버지가 잇따라 사망하면서 고아가 되었습니다.

1834년 정3품인 흥선군으로 승진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는 일이 별로 없는 명예직이었습니다.

 

하지만 철종이 아들도 없이 사망하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 12세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섭정의 형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고종이 즉위한 뒤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행했으나 전례에 따라서 조선시대에 성인으로 인정되는 15세가 되는 3년만에 철회하고 형식상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섭정을 하면서 양반세도가들의 심한 부패를 개혁하여 양인들의 세금부담을 줄여 좋은 정치를 시작하였지만, 서양문물을 배척하여 나라가 세계와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에 신경을 가장 많이 썼는데요, 왕권강화를 위해 고종의 왕비를 자신의 말을 가장 잘 들을만한 사람으로 왕비를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중에 눈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훗날 명성황후가 된 민씨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들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잘 듣고 나랏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왕비의 자리에 오른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이 고종 대신 나랏일을 맡는 것이 못마땅해서 번번이 흥선대원군과 맞서게 되었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은지 10년 만에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명성황후>

 

1873년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개방정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친족들이 하나, 둘씩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정치의 색깍이 워낙 반대여서 서로가 눈에 가시같았습니다.

 

 

 

명성황후의 죽음

 

1895년 음력8월20일 새벽, 명성황후는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일본 깡패들의 칼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라고 하는데요, 이사건의 주동자는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였습니다.

조선의 궁권안에서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어떻게 발생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둔 후, 조선은 일본의 처분만 바라는 바람 앞 등불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싫었던 명성황후는 러시아 힘을 빌려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다급해진 일본은 자기들을 멀리하려 하는 명성황후를 죽이려 작전을 짰습니다. 일명 [여우사냥]이라고 했지요.

여기서 충격적인 사실은 이 [여우사냥]에 흥성대원군이 개입했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너무 미웠던 흥선대원군은 일본이 자신에게 정권을 넘겨주겠다는 말에, 일본 깡패들을 경복궁을 침입할 때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고 합니다.

 

명성황후가 이렇게 어처구니 없게 죽었으나 흥선대원군 역시 이 후 정권을 잡지 못하고 일본에 의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아관파천)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지막이 둘 다 좋지 않아서 사실 알아도 슬픈 일들이라 머리속에 남기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둘 다 나라를 위해 일을 한 것은 사실이나 갈수록 자신의 영달이 앞섰다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를 보면서 다시 한번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역사를 생각하게 되었네요.